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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 진상규명 삼총사 아버지(퍼옴)
     
김성훈 조회수 1,235   등록일자 2001-03-22 17:13:46
기사를 읽다 눈물이 나서...
오마이 뉴스에서 퍼왔습니다.


의문사 진상규명 삼총사 아버지
"자식 잃은 부모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


정원옥/유 수 기자 angella71@hananet.net


▲ 의문사 진상규명 삼총사 아버지. 이들에겐 각자의 이름이란 없다. 그저 아들의 이름이 곧 내 이름이 되었다.

ⓒ2001 유 수
21일 오후 5시 서울역, 낯익은 얼굴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지난 99년 국회 앞 천막 농성장에서, 2000년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목숨을 건 무기한 농성과 삭발투쟁을 벌일 때마다 언제나 맨 앞자리에 계셨던 분들, 다름 아닌 의문사로 자식을 잃은 유가협 산하 의문사 지회 부모님들이었다. 지난해 12월 끝자락,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사건을 접수시킨 지 꼭 3개월 만이었다.

한창 손주 재롱을 보며 노년을 즐겨도 모자랄 연배의 부모님들이 또 다시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라는 플래카드 아래서 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그런 부모님들을 생경하다는 듯 다시 쳐다보고 가는 시민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아직까지도 그랬다. 의문사라니! 아직도 그 말의 뜻조차 얼른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자기 일로 닥치기 전에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게 여전히 야박한 세상인심이었다. 그것을 탓하기보다는 당신들의 알리려는 노력이 여전히 부족했다고 자박하며 대국민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오늘 그 분들이 또 다시 서울역으로 모이게 된 이유였다.

지난 십수 년 간, 의문사 진상규명은 오로지 유가족들만의 문제였다. 그 모진 세월을 오로지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죽기 살기로 싸워왔다. 그리고 십여 년 싸움 끝에 마침내 당신들의 손으로 직접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시켰다.

어느덧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이 되어버린 의문사지회 부모님들. 그 분들의 눈빛에는 이제 범접할 수 없는 위엄마저 흐른다. 아무도 해낼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았던 일을 당당히 해낸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비장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 가운데 '진상규명 삼총사'라고 불리는 세 분의 아버지가 있다. 의문사지회의 든든한 기둥이자, 어떤 투쟁의 현장에서도 몸을 사려본 적이 없는 행동파 대원. 최우혁, 신호수, 허원근 열사의 아버지가 그 분들이다.

(최봉규(71), 신정학(65), 허영춘(62). 당신들의 이름이 분명 있기는 하지만, 의문사지회에서는 누구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죽은 자식의 이름을 앞에 단 누구누구의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는 게 당연하게 되어버렸다. 죽은 자식들로 인해 맺어진 인연, 첫 만남부터 당신들은 최우혁, 신호수, 허원근의 아버지일 뿐, 앞으로도 영원히 그 호칭은 바뀌지 않을지 모른다.)



▲ 86년 6월 형사들에게 연행된 후 행방불명된 뒤 전남 여천군 대미산 동굴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신호수의 아버지.
ⓒ 2001 유 수
내 꺼멓게 탄 속 알아주는 사람들은 죄 모였네

"그 추운 겨울밤에 스티로폴 한 장 깔고 시멘트 바닥에 20, 30명씩 누워 자는데 추운 줄도 모르는 거야. 그때는 시위가 매일 있었거든. 하루도 안 거르고 집회장 쫓아다니고, 밤늦도록 농성하느라 피곤하기도 했지. 그런데 그게 아냐. 마음이 벌써 춥지가 않은 거야. 혼자 그 일을 당했을 땐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는데, 그렇게 모여서 싸우니까 추위도 모르겠고, 전경들한테 맞아도 아픈 줄을 모르는 거야. 내 꺼멓게 탄 속 알아주는 사람들은 죄 모였는데, 그게 얼마나 큰 의지가 되었겠어?"

88년, 기독교 인권위원회에서 30여분의 유가족이 모여 처음으로 '의문사 진상규명'을 사회적 문제로 제기하며 135일 농성투쟁을 전개했던 시절을 신호수 아버지는 그렇게 회고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은 사람들만이 그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다.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해질녘 국도에 점점이 버려진 사람들

89년 민자당 당사를 점거했을 때의 일이다. 경찰서에 고스란히 다 붙잡혀 갔는데, 경찰은 곱게 귀가시키지 않고 닭장차에 부모님들을 싣고 광명까지 데려가서는 2-3km 간격으로 한 명씩 국도에 떨어뜨리는 방법을 썼다. 이날 마지막으로 버려진 사람은 허원근 아버지였다.

"그때만 해도 서울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지리를 모르잖아. 돈도 한 푼 없고 막막하기 짝이 없었지. 그런데 그때 마침 버스가 한 대 와. 무조건 세워서 운전사에게 사정을 했지. 내가 이러저러하게 데모하다가 붙잡혀서 여기까지 왔는데, 가다 보면 우리 식구들이 보일 거다. 서울까지 태워주면 고맙겠다. 다행히 운전사가 참 좋은 사람이었어."

땅거미가 막 드리워지는 초저녁이었다. 버스 차창으로 고개를 쭉 내밀고 내다보면 정확히 2, 3km 간격으로 국도변을 터벅터벅 혼자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곤 했다. 뒷모습만 보고도 허원근 아버지는 저 사람이 우리 식구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느 새 식구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렇게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다 태워서 무사히 서울로 올라왔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 최우혁 아버지. 최우혁은 서울대생으로 87년 9월 군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 2001 유 수
이름도, 고향도, 이력도 다 다르지만…

"89년에 135일 투쟁 끝내고 유가협이 창설되면서 영남지회, 호남지회, 그리고 의문사 지회가 생겼어. 초대 지회장은 신호수 아버지가 하셨고. 그 후론 여기 허원근 아버지가 7년 동안 쭉 독재를 하고 계시지. 그러면서 내가 느끼는 건 단체의 위력이란 게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거야. 한 사람 더하기 한 사람은 둘이 아니거든. 열이 되고 스물이 되고, 세 배, 네 배, 열 배의 힘으로 막 불어나는 거지.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살면서 해온 일도 다 다르지만, 그렇게 뜻이 같으니까 형님, 동생 하면서 싸워올 수 있었던 거야."

칠순의 나이가 무색하도록 의문사 지회 총무로서 안방 살림을 너끈히 해내고 계시는 최우혁 아버지. 아버지 말씀대로 살아온 이력은 다르지만, 처음 마음 잃지 않는 착한 동생들이 옆에 있어서 최우혁 아버지는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삼총사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허원근 아버지는 전남 진도에서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다. 독재가 나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런 세상일은 당신과는 무관한 일인 줄 알고 살았다. 그저 내 가족 거두며 열심히만 살면 된다고 믿었던 순한 백성이었다.

일찍이 고향 여수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신호수 아버지는 요꼬(옷감 짜는 일)전문으로 작은 공장을 운영했지만 얼마 안 가 실패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 때문에 귀향하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기에도 바빴다. 당연히 정치에는 관심도 없었다. 공화당은 나쁜 것, 평민당은 좋은 곳이라는 게 알고 있는 정치의 전부였다.

유일하게 서울이 고향인 최우혁 아버지는 평생 전업사를 운영했다. 정치는 몰랐지만, 여당이 못마땅하기는 했다. 우혁이 서울대에 들어간 후 데모한다는 것을 알고도 심하게 나무라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불의를 보고도 비겁하게 타협한다면 그것도 사내다운 건 아니라고 여겼다. 그 때 적극적으로 말렸다면 아들은 죽음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최우혁 아버지의 눈가에 얼핏 깊은 회한의 물기가 어렸다.

"아들 죽고 나서 우리가 진상규명 싸움하면서 느낀 게 있어. 정치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이 결국은 우리 아들들을 죽게 만든 거 아닌가 하고 말이야."



▲ 유가협 의문사지회장 허원근 아버지. 허원근은 84년 가슴 양쪽과 머리에 모두 세발의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군대는 자살로 종결지었다.
ⓒ 2001 유 수
자식 잃은 부모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이유

"명동성당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그 당시엔 정말 하루도 안 빼놓고 싸웠거든. 그 때 사람들이 그랬어. 우리 부모들보고 독이 올랐다고. 어머니들이 앞에서 얼마나 날쌔게 전경들 무전기랑 방패랑 헬맷을 빼앗아 오는지, 그러면 우리 아버지들이 뒤에서 그거 다 부수고 난리가 나는 거야. 그래도 분이 덜 풀리면 주저앉아서 통곡을 하지. 그렇게 싸웠으니까 우리 부모들 입에서 그 소리가 먼저 나왔지. 자식 잃은 부모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고."

투쟁의 현장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전경들이 부모님들에게는 일차적인 분풀이 대상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허원근 아버지는 그런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내 아들 죽은 놈 잡아내라고 오열을 하며 어머니들이 뭇매를 때릴 때 묵묵히 맞고 있는 아들 같은 전경들을 볼 때마다 눈물이 핑 돌곤 하는 것이다.

1년이면 6천 여명이 어떤 이유에서건 군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이런 현실을 바꾸어야지, 더 이상 한 명의 무고한 젊음도 죽게 만들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지, 아버지는 어느덧 그렇게 아들이 만들고 싶었던 세상을 향해 가슴을 열어 젖히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교본이 된 '동굴 속 내 아들'

허원근 아버지가 모 경찰서에 붙잡혀 갔을 때의 일이다. 취조를 담당했던 수사관이 꽤 의협심에 불타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진술을 듣더니 "개××들" 욕을 하면서 "보호실에 가면 불편하니 여기 잠깐이라도 편하게 앉아 있다가 가라"고 배려해주었다.

수사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혼자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이리저리 둘러보던 아버지의 눈에 책 한 권이 들어왔다. "동굴 속의 반나체"라! 순간 신호수 사건이 섬광처럼 아버지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신호수 사건을 비롯한 의문사를 소개하면서 수사상 이런 허점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선 경찰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용 내부지침서였다.

허원근 아버지는 이 책을 몰래 숨겨 가지고 경찰서를 나오는 데 성공했다. 훗날 이 책은 5공 특위 청문회뿐 아니라 진상규명위원회에서까지 중요한 증거자료로 쓰였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은…

마지막으로 삼총사 아버지께 생활하시는 것의 어려움을 물었다. 세 분 모두 15년 가까이 생업을 포기하고 오로지 진상규명 일에만 매달려오신 까닭에 생활을 제대로 책임지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런 부분은 안 쓰는 게 좋을 것 같네. 말 안 해도 다들 빤한 사정인데…."

무척이나 거침없이 지난 15년 세월을 더듬어오신 삼총사 아버지 모두 마지막 질문에는 말끝을 흐렸다. 난처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질문을 한 것은 앞으로 받게 될 보상금 전액을 제보자들에게 보상금으로 내놓겠다는 귀띔을 들었기 때문이다. 최우혁 아버지가 거기에 대한 변론을 해주었다.

"우리가 그 동안 보상금 받으려고 싸운 게 아니잖아. 우리 자식들 죽음을 밝힐 수 있다면 내 재산을 다 내놓아도 아깝지 않지만, 그럴 수도 없는 처지니 어떡하겠나? 한 사람이라도 더 제보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돈이라도 기꺼이 내놓아야지."

세상에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자식 잃은 모든 부모의 마음이 또한 이와 다를까. 이미 내 품으로 안을 수 없는 펄펄 살아 뛰는 자식은 아니지만, 언제나 끝내는 자식 편을 들어주는 부모들처럼 이들 삼총사 아버지들은 자식이 생전에 염원하던 세상을 만드는데 기꺼이 거름이 되겠노라고 말했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해본 적 없다는 허원근 아버지, 원만하다 못해 무르다는 지청구를 듣는 최우혁 아버지, 한 번 붙으면 끝장을 봐야 하지만 뒤끝은 없다는 신호수 아버지. 미움도 원망도 한도 모두 삭혀버린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깔이 이런 것일까? 세월의 시름이 깊게 패인 세 아버지들의 주름자락 사이로 서울역 오후 봄햇살이 하얀 광채로 일렁거렸다.


▲ 아버지 삼총사가 손을 맞잡았다. 이 주름진 손이 주먹이 되고 투쟁이 된다.

ⓒ2001 유 수



의문사 사건에 대한 제보와 양심선언을 호소하는 서울역 캠페인이 일요일을 제외하고 4월 30일까지 계속된다. (4월 10일까지는 오후 5시~6시 30분, 4월 11일부터는 오후 3시~5시) 또한 사건의 작은 단서라도 알고 있는 이들의 제보를 접수받는다. (보상금 최고 5천 만원, 연락: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02-3703-5000,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02-313-4615)


2001/03/21 오후 10:58:16
ⓒ 200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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